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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안내]용산 상세 내용
[정보안내]용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7-03 조회수 104

조선시대 용산은

오늘날의 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와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용을 연상시킨다 하여 용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용산은 한양 도성 밖 한적한 강변 마을이었다.

삼남을 오가는 대로가 용산에서 갈라지고 각 지역의 세곡이 배로 운반되면서

자연히 물자와 사람이 용산으로 모여들었다.

용산은 특히 세곡 운송의 중심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토착민들이 세곡 수송에 종사하면서 큰 이윤을 남겼고,

전국의 상품유통을 장악했다.

 

19세기 후반까지 경강의 뱃길 따라 수상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

용산은 러·일전쟁, 한일병합조약 등을 거쳐

조선을 장악한 일본이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서쪽 용산역 주변으로 신시가지가 개발되고 일본인 거류 지역이 형성됐다.

토착민들은 군사기지 밖 지금의 보광동 쪽으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 시 미 육군 제7사단이 용산 기지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미 군정이 종료되면서 미군이 순차적으로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제8군은 서울이 수복되자 용산 기지를 재건했다.

이를 토대로 용산은 한국 사회에서 또 다른 이색지대를 형성했다.

용산 이태원 일대에는 기지촌이 형성됐고,

기지에서 반출된 물품들이 남대문 도깨비시장을 통해 유통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한국전쟁 후 북에서 월남하거나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용산 기지 인근 남산 자락에 마을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해방촌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과 외국인들이 용산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내국인들도 생업을 찾아 이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으로 모여들었다.

1976년에는 이태원에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이 개원하였고,

이슬람교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주도 증가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용산은 각양각색의 외지인들이 모여 사는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터전이 되었다.

용산은 한강로가 중앙을 가로지르고

상업 지구, 업무지구, 전자상가, 자동차 수리 상가, 외국인 상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용산역 주변은 철도교통의 중심지로서 철도 관계 시설이 모여 있고,

강변도로를 따라 이촌동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한남동에도 고급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고,

한남동과 이태원동에는 50여 개국의 외국공관이 모여있다.

 

용산 자체가 이색 지대이면서 모두 관광지라 할 수 있지만

국립 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용산가족공원, 효창공원, 용산 역사 박물관, 숙명여대 박물관등이 있다.

용산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베트남 퀴논 거리, 로데오 패션거리, 앤티크 가구거리, 경리단길, 해방촌 길, 한남동 가로수길, 등이 있다.

 

전후 용산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는 빠르게 도시화되었다.

2003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군 기지 이전을 합의.

100여 년 동안 외국군이 차지했던 용산 반환이 결정되고,

20225월에는 대통령실의 용산 전으로 명실공히 용산은

서울의 중심,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50+기자단 양정숙 기자(tomymelon@naver.com)